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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애덤 스미스(국부론, 보이지 않는 손, 도덕 감정론, 노동가치론)

by 아낌없이 주는 그루트 2023. 11. 8.

애덤 스미스가 인간의 부정직함을 깨닫고, 정부의 법과 규칙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 즉 관세 보호 등을 모색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가 '국부론'을 저술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피페의 커크칼디 세무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일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1723 1 14일에 커크칼디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애덤의 아버지는 스미스가 세례를 받기 6개월 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 나이 4살 때, 일단의 집시들에게 납치되었지만, 다행히도 삼촌에 의해 구출되어 어머니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스미스의 전기 작가인 존 레이는 가벼운 유머를 더해 애덤 스미스가 집시로서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스미스의 아버지는 연합조약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해안에서 밀수 활동이 급증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심화를 제공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 철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미스는 고전 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알려져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1748, 케임스경의 지원 아래 에든버러에서 공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 강의로 그의 명성이 시작되어 1751년에는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1750년경에는 데이비드 흄을 만나 독특한 우정을 형성하게 됩니다. 14세 때,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한 애덤 스미스는 도덕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인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 철학을 습득했습니다. 1740,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대 생활은 그에게 큰 영감을 주지 못해 1746년에 자퇴했습니다. 1778년에는 스코틀랜드의 관세 위원이 되고, 1787년에는 글래스고 대학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영국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또한 윤리학자로도 인정받았습니다. 1759, 그의 명성은 유럽에 퍼졌으며, '도덕 감정론'이라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1764년부터는 귀족인 타운젠트의 아들을 가정교사로 따라 유럽 여행을 시작하며, 2년 동안 프랑스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연구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이론과 사상을 습득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글쓰기에 전념하여 1776년에는 유명한 '국부론'을 발표하며, 경제 활동에 정부의 간섭 없이도 '보이지 않는 손'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책은 경제학 사상의 첫 번째 체계적인 저작물로, 이후 많은 학파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유 시장 경제를 통해 무역과 노동 분업이 군주나 국가보다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당시 중앙계획 경제 체제에서는 정치적 권력이 경제적 지위를 결정했지만 시장 경제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배자, 범법자도 부유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 경제가 개인들이 사고팔며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사회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봤으며, 그의 유명한 말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 정신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는 시장 내에서 가격이 공정한 규칙 아래에서 자유롭게 형성되면 적절한 가격이 자연스럽게 결정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금 가치가 불안정한 시기에 각 국가 간 생산물 가치를 측정하는 데 안정된 척도로서 노동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비판하며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판 노동 가치설을 제시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애덤 스미스는 잉여 가치론에 큰 영향을 미친 셈입니다. 애덤 스미스의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그의 '노동 가치설'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부가 가치가 노동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마르크스와 달리 애덤 스미스는 노동 가치를 가치 척도로 강조했습니다. 다른 한쪽은 케임즈와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얻은 냉정하고 회의적인 인간 특성과 동기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상을 적절히 융합하여 인간 본성을 이해하고 현대 경제학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스미스의 사상은 두 가지 계몽주의의 융합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한쪽은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온 부드러운 면으로, 인간의 내재한 선의를 믿는 것이었고, 교육과 계몽을 통해 인류를 더 높은 수준으로 이끌고, 자연법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스미스의 국부론은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론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전의 시대에도 어떻게든 노동의 결과물을 보수로 받는 것에 대한 설명에서 일관성을 잃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론은 노동자나 노동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면 잉여가치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의 결과물이 100% 자본가에게 귀속된다는 점을 무시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사회적 통제는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하며, 자율적인 작용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사회적 자원을 적절하게 분배함으로써 군주나 계급 사회가 아닌 일반인도 경제적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스미스를 보수주의자나 자유주의자로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미스는 독점과 외부 개입을 철저히 거부한 측면을 가졌습니다. 스미스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적 사상은 영미 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제시한 시장 중심 철학은 산업혁명과 같은 혁신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생산 동기를 주는 가격은 시장이 결정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철학을 정립했습니다. 도덕적인 인간은 본질적으로 두 개의 "자아"로 나뉘며, 양심의 목소리를 듣고 판단하는 대상이 하나가 됩니다. 이 양심은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타자로, 스미스에게 판단은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만드는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여겼습니다. 스미스는 자기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개의 사람"으로 자신을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관찰자이며, 특정 시각에서 자신을 둔 사람으로, 자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판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으로, 판단을 받는 역할을 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심사자였고, 두 번째 사람은 심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미스의 주장은 인간의 권리조차도 신분, 출생, 성별, 인종, 연령, 계급 등과 같은 이유로 박탈되는 사회 구조보다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지만, 자본주의가 부적절하게 활용될 경우 특정 집단의 대다수가 자본 소진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특정 권력층이 권력과 자본을 집중시킬 때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본 시장을 통제하는 자와 정치와의 결합을 어느 정도까지 억제하지 않으면, 기능이 저하되고 계급화된 사회 구조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의 이론은 어느 정도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